1963년의 후지테레비의 <철완아톰>(鉄腕アトム)의 파급력은 애니메이션 제작회사와 다른 방송사들의 마음가짐을 다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데즈카 오사무의 열악한 애니메이션 제작비용의 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이후 계속해서 그 제작 패턴을 유지하는 것도 어떻게 본다면 <아톰>이 가져다 준 영광(?)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TV애니메이션에서의 아톰의 위력은 상당했다. (오죽했으면 근 몇년전 일본의 경제침체를 '아톰'이벤트로 벗어나려고 했을까. 과거의 영광을 다시 보고 싶은 일본인들의 열망이자 상징적 존재가 아톰이라는 사실은 당시 어느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뒤에 다시 1963년 부근의 TV 애니메이션의 다른 분류를 이야기해보겠지만 이러한 상황속에서 드러나는 사실 중 하나는 몇몇 소규모 제작사들이 애니메이션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무시 프로덕션은 나름대로의 위용을 자랑하면서 후지테레비와 연결되어 있었고 (타츠노코 프로덕션도 역시 후지) 그리고 토에이 동화는 NET(아시히 테레비), TBS는 TCJ(에이켄)과 연결되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아톰의 후폭풍속에서 이에 동참하려는 시도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었다.
늘어가는 TV 애니메이션에 대한 요구, 그리고 인재의 부족
텔레비전 방송사들은 사실 더 많은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원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더 이익이기 때문이었다. NET는 그래도 나름대로 토에이 동화와 긴밀히 연결이라도 되어있었지만 (후지는 무시프로덕션) TBS는 당시 CM으로 애니메이션을 주로 만들었던 TCJ외에 기댈 곳이 별로 없었다. 마침 TCJ도 후지테레비와 <철인28호>(鉄人28号)로 연결되어 있었기때문에 <에이트만>(エイトマン)을 방영하는 것 이외에 추가적인 발주를 내더라도 TCJ가 받아줄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자구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유사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만한 인물에게 위탁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도쿄무비의 창시자 후지오카 유타카(藤岡豊)가 등장하게 된다. 후지오카 유타카는 1963년 인형극<이가의 영환>(伊賀の影丸)을 제작하기도한 도쿄 인형시네마(東京人形シネマ)에 몸을 담고 있었던 인형극 제작자였다. 인형극 제작자에게 애니메이션 제작을 맡긴다라는 엉뚱한 발상은 인형을 움직이는것과 그림을 움직이는 것도 결국에는 같은 방식'일것이라는 판단에서 떠오른 차선책이었다. 당시에는 인형제작자말고서라도 영화쪽 인재들이 애니메이션쪽으로 투입되는 상황이었으니 어찌보면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극'이라는 점과 연출이라는 공통이 있었으니까 애니메이션 기술적인 부분만 어떻게 한다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후지오카 유타카는 TBS로부터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임받아 제작을 시도, 1964년 , 그 이름도 찬란한 <도쿄무비>(東京ムービー)를 발족하게 된다. 도쿄무비는 애초부터 TBS의 출자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때문에 TBS TV방송으로의 긴밀한 협력관계가 필수적이었고 물량수급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애니메이션 질'에 있었다. 도쿄무비의 초창기멤버들은 역시나 골수 애니메이터들은 별로 없었으며 인형극단의 테크니션들, 연출자들이 대거 포진한 희귀한 구조로 가다보니 역시나 기술적 한계점들으로 시행착오를 겪게 된다. 더우기 회사는 이들이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감당하는 비용상승을 감내하기가 어려웠는데 애니메이터들은 사실상 굉장한 노동에 시달리는 만큼 그에 합당한 임금의 상승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멤버들로 자부심 가득한 나가하마 타다오(長浜忠夫) 감독이 등장하고 있으며 (로망로봇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로봇물의 전설적인 연출자), 루팡3세의 초기 이미지를 설계한 오스미 마사아키(大隅正秋)도 등장한다. )
폭주하는 제작비용, 그리고 애니메이터들의 시대
당시 애니메이터들은 부르는게 값이었다고 할만큼 고임금의 구조로 흘러가고 있었다. 도쿄무비가 <빅X>『ビッグX』를 야심차게 준비하다가 적자를 맞이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에는 이 애니메이터들의 고임금도 이유중 하나였다.. 일례로 토에이에서 애니메이션 초기작들에 가담한 인재들은 알게모르게 하늘높은 줄 모르고 임금이 치솟고 있어서 토에이 역시 굉장한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토에이는 아톰의 위력을 절감하고 갑작스럽게 시도한 츠지오카 사다오(月岡貞夫) 기획작 <늑대소년켄>을 비롯하여 <소년닌자 후지마루>(少年忍者 風のフジ丸)까지 굉장한 스피드로 제작에 착수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편린이 드러난다. 다급한 제작기간에 쫓기다보니 추가 작업량은 증가될 수 밖에 없었으며 추가 작업에 대한 인센티브는 잔업수당이었므로 자꾸만 인건비는 상승하는 구조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인재로 각광받던 오오츠카 야스오(大塚康生) 그렇고 <백사전>(白蛇伝)의 세컨드 원화가로 서포트 했던 쿠스베 다이키치로우(楠部大吉郎)도 역시 추가 잔업의 요청으로 수당이 점점 증가 (<백사전>의 원화진이 사실상 2명(모리야스지와 다이쿠하라 아키라(大工原章))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원화인재로 한명이 더 존재했었다. 세컨드 원화로 서포트를 담당했으나 스텝진과의 불화로 초기가담이 적었던 인물, 바로 쿠스베 다이키치로우가 그였다. ) 이윽고 쿠스베 다이키치로우는 정사원의 무려 10배가 넘는 임금을 받게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수준은 토에이 동화의 사장의 수준을 상회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사실상 토에이가 자초한 일이었음에도 이 사건은 회사 안밖으로 굉장한 논란거리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쿠스베가 회사를 떠나게 된 배경에는 이런 사측의 견제와 불편한 시각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명작동화진의 재편, A프로덕션의 등장
쿠스베는 결국 1965년 9월 퇴사. (『動画王』vol.7 キネマ旬報社、1998年、50-74頁より)(토에이 동화는 쿠스베 다이키치로우의 타사입사를 방해하려고 계속해서 타사들에게 고용하지 말아줄것을 통보했다고 알려졌지만 무시 프로덕션의 테즈카오사무는 쿠스베에게 '중역으로 대우'해줄 것을 약속하며 입사를 종용하고 있었다. 쿠스베 다이키치로우의 위상은 이정도였으니까 다른 애니메이터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 도쿄무비의 유타카에 매력을 느끼며 산하 'A프로덕션'이라고하는 제작소를 설립했다. (이름의 유래로는 에이스들만을 모은다라고 한는 막연한 의미에서 붙였다고 알려진다.) 토에이에서 <멍멍 츄신구라>,<늑대소년켄><허슬펀치>의 작화감독을 역임했던 시바야마 츠토무(芝山 努), 고바야시 오사무(小林治), <사이보그009>의 원화가 카바시마 요시오(椛島義夫)、70년대와 80년대를 넘나들며 캐릭터 디자인과 작감으로 이름을 날리게되는 모리시타 케이스케(森下圭介) 등이 주멤버였다.
사실 A프로덕션은 더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토에이 동화에서 이탈되는 명작동화계열의 애니메이터를 수혈받으면서부터다. 이는 바로 토에이가 TV애니메이션제작을 위해서 젊은 애니메이터 위주로 '저급 퀄리티'를 마다하지 않는 정책으로 문예성짙은 극장판에 주로 가담했던 '진보성향'의 애니메이터들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조짐과 맞물려 당시 노동조합에서 격렬분자로 이름을 날렸던 이란성 사상 쌍둥이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勲),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를 비롯하여 입사동기이자 당시 굉장한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애니메이터 오오츠카 야스오(大塚康生), 고타베 요우이치(小田部羊一), <레인보우 전대 로빈>의 요시다 시게츠구(吉田 茂承), 나카무라 에이이치(中村 英一)까지 위력적인 작화능력을 뽐내던 인재들의 핵심들이 차례로 A프로덕션으로 이적해버렸다. (당시 이적멤버들은 토에이 동화가 입사시 백수십명의 경쟁률을 뚫고 모집한 몇명의 인재들도 끼어있어서 토에이 동화로서는 뼈아픈 인재유출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토에이 본사의 조짐을 눈치챈 많은 인재들의 마음속에는 '이때가 아니면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열악한 애니메이션 제작 상황은 계속 되고...
이후 TV아니메의 전성시대가 열리면서 A프로덕션은 굉장한 퀄리티로 도쿄무비의 찬란한 도약을 이끌게 된다.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좀더 미뤄두고 당시의 애니메이션 제작상황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바야흐로 애니메이터들의 가치가 폭주하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수급불균형에 걸맞지 않게 63년 부근에서 66년까지 애니메이션의 수급은 굉장히 힘든 작업의 연속이어서 '졸속'이나 '날림'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웠다. 이것은 TV의 편성스케줄을 지켜야하는 압박감에 따른 의도적인 질적하락이기도 하였으나 작품수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애니메이션 전문가의 부재와도 관련이 있었다. 굳이 TV편성의 특성을 따지지 않더라도 당시의 애니메이션은 '만화'와 달라서 무작정 그림만 그려내서는 결코 완성작으로서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수가 없었다. 애니메이션은 동화상이었으므로 노하우가 필요했으며 이를 이해하기 위한 인재찾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부 : 대체로 토에이같은 경우에는 '영화 연출'의 개념으로 애니메이션을 이해했으므로 '실사'쪽에서 잔뼈가 굻었던 연출진들이 대거 동화쪽으로 이동하여 작품을 이끌었다. 그래서 토에이 초장기 자료를 보거나 야부시타 다이지같은 연출가의 인터뷰에 '영화쪽에서 일하다가 부지불식간에 애니메이션으로 끌려들어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의 수요를 갈음하기위한 신속한 조치는 '영화쪽 인재 끌어다쓰기였던 것이다.)
애초부터 애니메이터를 꿈꾸던 인력들의 대개는 소규모 제작사에서 CM 단편을 제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고비용의 제작비용을 감안한다면 '장편작'으로는 도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현실적인 전문가들은 '절대적 적자를 감안하지 않고서는 결코 '장편'은 만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시기였다.(이런 의견들은 당시 TV 제작을 주로 전담했던 TCJ의 애니메이터들이 체감적으로 느껴왔던 견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TV CM를 주로 만들었던 TCJ(현 에이켄)같은 경우도 초반부 자신들이 자부심을 가졌던 분야는 바로 애니메이션 CM이었고 이런 CM조차도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테크닉에 한해서는 무라타 만화제작소라든지 아시다 만화제작소등의 도움을 빌어서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TV CM의 변화가 일어났다. 애니메이션 타입의 CM를 배제하고 실사쪽으로 전환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TCJ같은 제작사로서는 이제 단편 애니메이션에서 벗어나 장편쪽으로 갈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무시프로와 토에이가 아니메를 만들고 있을 무렵, 이미 CM을 만들고 있었던 TCJ는 이렇게 애니메이션 제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시다 만화제작소(芦田 漫画製作所)
아시다켄(芦田巌)이 이끌고 있었으며 아시다는 애니메이션의 초기선구자격으로 알려진 야마모토 젠지로와 오랜 친구사이이기도 했다. 아시다는 애니메이션 업계로 뛰어드는 후발주자들에게 대해서 상당히 배척하거나 거부의 의사를 표시했었는데 이것은 당시 애니메이션의 풍토가 굉장히 매니악에 가까울 만큼 열정적인 태도로 임했으므로 상업적으로 침해당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을 배우러 온 토에이 동화1기생 오오츠카 야스오에게 "너의 그림은 애니메이션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그만두는 편이 좋다' 라고 하거나 (오오츠카 야스오大塚康生/아니메쥬 문고 <작화 땀투성이> 73페이지 アニメージュ文庫「作画汗まみれ」73ページより), '뭐든지 좋으니까 써주세요'라고 고개를 숙인 테즈카 오사무에게 '포기하라'고 강권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虫)/도쿄신문 '나의 인생극장' 東京新聞「私の人生劇場」1967年11月3日)
TV 아니메의 산실, TCJ의 변신
시간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TV등장은 다음과 같다. <새로운 동영상 3개의 이야기>(新しい動画 3つのはなし)、<인스턴스 히스토리>(インスタント・ヒストリー) 、<만화캘린더>(おとぎマンガカレンダー)、<철완아톰>(鉄腕アトム) 이 순이다. 이 다음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 바로 TCJ가 CM일을 놓고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뛰어든 선인부락(仙人部落)이 된다. 방영시기는 9월 그러니까. 아톰이 연초에 방영되고 그 해 가을에 선인부락이 등장하게 된 셈이다. 시기적으로는 선인부락이 아톰의 뒤쪽에 놓이지만, 선인부락의 제작당시 데츠카 오사무는 데츠카 오사무 프로덕션의 애니메이션 멤버들을 데리고 견학을 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거의 동시기에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톰이 발빠르게 움직였던 셈? ), 어찌되었든 9월에 선인부락, 그리고 연이어 10월에 요코하마 미츠테루의 유명작 <철인28호>를 등장시킨다. 더 많은 작품들을 방송편성에 넣을 필요가 있었던 방송사들은 제작측에 더 많은 라인업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지TV에서 2개의 작품을 TCJ로부터 수급하자, 다른 방송사들도 급해지기 시작했다. 앞서 이야기한데로 토에이는 자사 NET를 그리고 후지TV는 무시프로덕션, TCJ를 연결시키고 있었다.
물론 무시프로덕션의 <아톰>,그리고 TCJ의 철인28호등이 등장할 무렵에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토에이도 넋놓고 있지는 않아서, 자사의 천재 애니메이터로 불리웠던 츠키오카 사다오(月岡貞夫)로부터 새로운 기획을 받아들여 <늑대소년켄>>(狼少年ケン)(1963.11.25)의 제작에 돌입하긴 했다. (연출은 세리가와 유고. 그리고 타카하타 이사오도 가담) 투입된 스텝진들은 굉장히 일률적이지 않고 산만스러웠는데 이는 토에이가 TV애니메이션을 어떻게든 만들어야 했으므로 졸속의 구성으로 인력을 구분하지않고 무작위로 투입하고 있었기때문이다. 아톰과의 간극을 줄이기위해서 급한 나머지 가용멤버들을 대책없이 임시방편 등판시킨 것이다. (결국 때문에 늑대소년켄의 스텝롤은 변화무쌍하게 매회 바뀌게 되었던 것이고 이를 두고 보던 츠키오카는 '들쑥날쑥한 작화의 저질화를 참담하게 바라보다가 3개월 후 사직서를 과감히 던졌다.) 기민한 대응은 적절했으나 퀄리티가 못미치는 상황은 당시의 TV애니메이션의 상황을 엿볼수 있게 해준다.
1963년 - 선인부락 (후지테레비), 늑대소년 켄(토에이/후지), 철인28호 (후지테레비,덴츠), 에이트맨(TBS)
1965년 - 소년닌자 후지마루, 정글대제, 스파제타(TBS), 우주소년소란(TBS),
1966년 - 유성가면(후지), 요술공주 샐리.
1967년 - 모험가보텐섬, 스카이야즈5 (TBS), 황금박쥐. 마하고고
1968년 - 사스케(TBS), 태양의 왕자 호루스. 요괴인간. 사이보그 009
1969년 - 인풍카무이외전(후지), 장화신은 고양이.하늘을 나는 유령선. 무밍(즈이요)비밀의 앗코짱.
1970년 - 내일의 죠.
모두가 다 무시 프로덕션처럼 제작할 수는 없는 노릇, 머천다이징의 함정.
앞선 아톰의 방영에서 수많은 TV 제작사들이 느꼈던 한가지는 '아톰처럼 만들면 된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고 보니 아톰의 제작방식은 문제가 너무 많았음이 드러나고 있었다. 먼저 TV애니메이션 분량이 압도적이어서 일정내에 작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미 알려진대로 무시프로덕션이 아톰제작당시 협의한 제작비는 '너무나 말도 안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TCJ의 주력멤버였던 다카하시 시케히토(高橋茂人)(바로 훗날 <알프스 소녀 하이디>로 유명해진 즈이요 영상의 창립멤버) 역시 테즈카 오사무의 애니메이션 제작비용에 대해 굉장히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제작비용도 비용이었지만, 무시 프로덕션이 머천다이징을 통해서 수익을 거둘만한 위치에 놓여있었던 것과 달리 다른 제작사들은 이런 권리를 얻는게 보통 어려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철인28호만해도 기획 및 시나리오 발주, 그리고 녹음, 편집등의 권한을 제작사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후지(덴츠)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부분의 권리만 가지고 제작일정내내 비용을 버텨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30분 애니메이션 단위로 1회 제작하는데 120만엔이 들어갔으며 시간적으로는 1개월을 소모했다. 철인28호 방영개시되기 3~4개월전부터 적자로 치닫고 있었다고 다카하시는 토로하고 있었다.) 이런 구조를 타개하기위해서는 하청제작이 아니라, 방영권 및 저작권을 한번에 거머쥐어야 했다. 이를테면 재방송, 그리고 상품화에 대한 권리자체가 제작사측에 놓여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는 훗날 <사스케>를 제작할때 본격적으로 적용되어 제작비 500만엔으로 낙찰..주변권리까지 모두 가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된다.) 한마디로 당시 아톰으로 촉발된 TV애니메이션의 러쉬는 애니메이터들의 피를 빨아먹는 고된 악순환의 고리였고 이를 토대로 보다 더 많은 인력, 여기에 임금수준은 열악하기 짝이 없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테즈카 오사무에 대한 애니메이터들의 원한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이후의 전개가 어찌되었든 간에 결국 먹고살려면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야 했다는 것. 이것이 그들을 슬프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2부 끝.>
<3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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