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즈카의 뉘앙스를 닮아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파프리카>(パプリカ. 2006)(콘사토시(今梅) 작)에서 오밀조밀한 레이아웃과 화려한 색감배열의 퍼레이드 씬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미하라 미치오(三原三千夫)는 <아니메 스타일>(ANIME STYLE)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일본 애니메이션의 획은 역시 모리 야스지(康二森)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후 사실상 그의 영향 아래 놓여있다고 본다" 라고 말이다. (미하라 미치오는 이전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姫 )(1997)의 작화에서도 엄청난 실력을 발휘하여 세간의 이목을 받고 있었던 인물이다.) 말그대로 해석해 볼 때 이러한 견해는 특출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애니메이터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었을 선배에 대한 존경심만 놓고 보더라도 모리 야스지는 거장 이상이 되어야만 했으니까.., 오히려 모리 야스지로부터 직접적(?)영향을 받은 후진들의 입장에서 맞닥드리게 될 경건한 애니메이터로서의 '자격'과 자부심 정도는 감수할 가치가 있는 훈장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야스지에 대한 찬양 이후 미하라 미치오는 괴이한 언급을 하나 더 붙인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획은 모리 야스지스럽다기 보다는 오히려 테즈카 오사무( 手塚治蟲)적이다' 라고......야스지의 적자라고 불리웠던 하야오 감독의 정체성을 야스지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사실자체가 '계보'를 흔드는 논란거리가 될 수 있었다. 왜 하야오 감독에게서 야스지보다 테즈카의 향기를 더 느끼게 되었던 것일까?
모리 야스지가 '일본'스러운 스타일을 만든'창조적' 인물이었으나 그의 정통을 부여받았다고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 마저 스승을 닮지 못하고 테즈카 오사무를 오히려 더 닮았다는 부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알려진대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리 야스지'의 토에이적인 오피셜 라인업의 선명한 후계자였다. (물론 뒷날 토에이의 정책변경에 의해 이런 평가가 무색해지지만..) 이렇게 보자면 모리야스지스럽다는 부분이 오히려 하야오에게 엉겨붙어 다른 아니메적 특성에 틈새를 주지 않았어야 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야오 감독의 세대는 모리 야스지의 감성을 듣고 보고 자란 세대라고 보기는 힘들며 그보다 차라리 테즈카 오사무의 '만화 영향력'아래에서 성장한 만화 키드였다고 보는편이 더 옳다. 따라서 훗날 아니메의 발전사를 관통하는 인재들의 저변에는 데즈카의 잔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모리야스지의 제자들은 다음과 같다. 사카모토 유사쿠(坂本雄作)、오오츠카 야스오(大塚康生)、히코네 노리오(彦根のりお)、오쿠야마 레이코(奥山玲子)、타카하타 이사오(高畑勲)、츠키오카 사다오(月岡貞夫)、나카무라 카즈코(中村和子)、코타베 요이치(小田部羊一)、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나카사와 마코토(永沢まこと)、하야시 세이이치(林静一)、스기이 기사부로(杉井ギサブロー). 48세에 토에이 동화 퇴사하여 니폰 애니메이션으로 이동하여 세계명작동화의 전성기를 여는 메인스텝으로 활동한다. <프란다스의 개>(1975),<알프스소녀 하이디>(1974)는 이때의 작품이다. 모리 야스지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3가지, <백사전>,<장화신은 고양이>,<태양의 호르스의 대모험>는 주는 상징적 의미를 제외하고도 후진양성에 인격적인 면모로 기억되기 때문에 모리 야스지의 업적이 배가되고 있다. 이를테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존경받는 선배의 상징성이라고나 할까.
▶ 모리 야스지 (부연설명)
특히 모리 야스지의 경우는 소속이 어디였건 간에 후배들의 도움을 받고 그대로 넘어가지 않고 소속을 불문하고 가담, 도와주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진정한 대인배다운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그가 가진 애니메이터적 감성이 그대로 후배들에게 옮겨가는 '존경'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의 애니메이션은 '꿈'을 말하고 '희망'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넘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너그러운 배려가 더욱더 빛을 발하곤 하였는데 실제 후배들이 그의 이미지를 계승발전시키면서 '자존심'과 '예술'로서의 추구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하고 고민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아마 토에이 정통의 계파에서 모리야스지의 이런 상징성 때문에 '상업적' 추구에 대한 지나친 매몰을 꺼려하고 피했는지도 모른다. 토에이가 초반부에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질 무렵의 인재들은 이런 풍토에서 나름대로의 신념을 뿌리로 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토에이 동화' 스텝진들의 자부심이란 바로 이런 정신적 풍요로움과 자존심에 비례했을 것이다.
디즈니로 시작된 애니메이션 붐
단괴세대라고 불리우는 45년생의 키드들은 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아니메의 주요 소비층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애니메이션은 '아니메'라고 불리우기 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애니메이션 그 자체를 의미했다.) 이런 토양의 밑바탕에서 흠뻑 애니메이션의 자양분을 제공했던 저변은 역시 당시 문화적 매체로서 인기를 구가했던 데즈카 오사무같은 만화가로부터였다. (데즈카 조차도 문화적 주류의 입장에서 만화를 그려댔다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한편 디즈니의 성공으로 부터 막연한 희망을 품은 애니메이터 희망자들은 취향적으로 테즈카적인 뉘앙스를 품고 지향점으로 디즈니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초반 애니메이션의 분위기는 '디즈니'를 흠모하는 듯한 스타일로 전개되는 것에 거부감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모리 야스지의 애니메이션 선도는 '디즈니'를 지향점으로 한 전통적 이미지의 이식이었다고들 한다. (솔직히 모리 야스지가 백사전에서 선보인 이미지는 일본 애니메이션화된 선구적인 시도였다고 평가받았지만, 드라마를 애니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디즈니 이후 스스로의 정서적 베이스가 테즈카적이란 사실을 인정하든 하지않든 은연중에 많은 애니메이터들의 작품에서 유사 테즈카의 흔적이 드러나고 있었다. 테즈카의 만화에서 등장한 원에 가까운 선처리를 비롯한 캐릭터들과 이야기 흐름들은 이미 디즈니와 유사하기도 했고, 극화스타일이 등장하기전까지만 해도 모리 야스지와 테즈카를 구분해야만 한다고 하는 선명한 가르기는 모호했다. 결국 이 시대의 핵심은 스타일의 구분없이 '다같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자' 라는 정도로 요약될 수 있었다.
당시 테즈카 오사무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거짓말에 가깝다.
적어도 그의 만화적 소산에 영향을 받은 애니메이터들은 부지기수였고 알게 모르게 테즈카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 TASTUKA OSAMU
토에이의 정통성, 그리고 B급 애니메이션에 대한 본능.
그렇다면 모리 야스지와 테즈카 오사무로 분파가 양분되는 현상은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이것은 스타일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애니메이션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게 아닐가싶다. 우선 토에이의 등장에서부터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나 이미 매니아들이 다 아는 토에이의 역사적 추이를 이야기해봐야 따분하기만 할 뿐 이글의 주제에도 맞지 않으니 좀더 다른 측면으로 전개해보도록 하자. 토에이 동화의 1기에 해당하는 오오츠카 야스오(大塚康生)는 60년대 당시의 B급 아니메에 전력투구하는 토에이 동화의 변질에 대해서 실망감을 토로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나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勳)도 언급한 '예술가 본연의 자세를 회복'하자던 내막과 관련이 있다. 요약하자면 애니메이터들의 권리를 강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당시 노조문화에 대한 직간접적인 의견 표출이었던 것이다.
토에이는 무시 프로덕션의 TV시리즈 어택으로 미디어의 전환점이 어떻게 변모해가는지 서서히 눈치채고 있었다. 비용은 높지 않으면서도 관객들의 흥미를 끄는 방식에 대한 생존욕구라고 할까. 이 과정에서 토에이 정통이라고 불리우는 모리 야스지같은 인물의 지대한 공헌 같은 것은 현실적으로 와닿지 못했고(전적으로 작품성만을 논하며 상징적으로 작품제작을 할순 없는 노릇) 새로운 변신의 일환으로 테레비라는 매체에 대한 적응력을 높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토에이의 애니메이터들을 테레비쪽으로 이동시켜야 했으나 노조라는 강력한 방해세력을 만나게 된다. 결국에는 토에이 애니메이터들과 수뇌진들의 시선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테즈카 오사무의 '무시 프로덕션'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토에이 동화가 발족하면서 애니메이션 제작의 노하우를 얻어온 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도록 하자. 토에이는 애니메이션 제작기술을 '양성'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지않고 당시 애니메이션 제작에 나름 일가견이 있었다고 불리워지는 소규모 인재집단을 등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들이 다이쿠바라 아키라(大工原章), 야부시타 타이지(藪下泰司), 야마모토 젠지로(山本善次郞), 그리고 모리 야스지(森康二)였다. 이 4명의 인물을 두고 토에이 초기 4인방으로 부르곤 하는데 이들이 펼쳐낸 초기 토에이 동화의 지향점은 <백사전>을 시작으로 화려하게 꽃피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별 이견이 없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제대로 된 효시라고나 할까. 이 시점을 기반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제작은 지속적으로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 풍요로움에 이상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몰락은 테즈카 때문이 아니라 , TV 매체의 등장.
이 변화의 중심에는 TV의 등장에 있다. 텔레비젼의 가능성은 '영화적 수익성'을 넘어서는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는데 초기에는 단순히 CF에 애니메이션을 이용하자는 정도였었다. 하지만 서서히 영화 중흥기가 꺼져가면서 완연히 TV쪽의 수익성은 신뢰를 더 공고히 만들어주는 판단요소였다. 무엇이든 돈이 되어야 기업을 운영할 수 있었으니까 토에이가 흡수했던 자본과 인력의 크기는 '수요'에 대한 문화적 변화로 인해 수익성과 밸런스를 잃어가면서 '배신'의 행위는 정도를 더해갔던 것이다. (이미 앞서간 디즈니도 같은 양상이었다. ) <백사전>(白蛇伝)(1958)으로 상징적인 타이틀을 거머쥐고 <서유기>(西遊記)와 <아라비안 나이트>(アラビアンナイト シンドバッドの冒険),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모험>(太陽の王子 ホルスの大冒険)(1968)까지 이어져온 자부심을 뒤로 하고, 결국 '싫으면 떠나라'라는 통보가 토에이 애니메이터들의 책상에 당도하게 된다. 이 완벽하게 반전된 처지를 돌이켜보면서 애니메이터들이 감정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에 적합하지 않았음에도 당시에는 유독 '한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테즈카 오사무였다.
테즈카는 애초부터 토에이 동화진과 협업을 초기에 시도했었드랬다. 서유기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애니메이션을 통한 꿈의 실현을 목적으로 했었기 때문에 그의 성향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TV아니메로의 진출이 눈앞에서 펼쳐지면서 무시 프로덕션으로 상징화 되는 TV아니메로의 진출은 애니메이션을 전혀 모르는 '변절자'의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이다. 애니메이터들은 이 시점에서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무시 프로덕션이 <철완아톰>을 TV아니메로 제작하면서 받아들인 애니메이터들은 왜 무시 프로덕션을 선택했던 것일까?
사카모토 유사쿠(坂本雄作)를 비롯하여 오토기 프로덕션의 야마모토 에이이치(山本暎一)(훗날 우주전함 야마토의 제작을 위해서 테즈카를 떠남). 그리고 곤노 슈지(紺野修司), 스기이 기사부로(杉井ギサブロー)까지 무시프로덕션로 자리를 옮긴 인재들의 선택에는 '애니메이터로서의 역할'이라는 고심의 흔적이 있었다. (물론 무시프로의 초기 동화진은 이들이 전부..대략 4명과 신인들 몇명이 다였다.) 당시의 토에이는 월급과 노동조건 개선에 대한 이견차이로 격렬한 대립이 노조와 회사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1년에 1편정도 제작할 여력밖에 없었으며 이런 한정된 리소스에 제대로 된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꿈을 펼친다는 것은 거짓말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애니메이터들은 자신들의 꿈을 펼친다는 명목하에 토에이로부터 무시 프로덕션으로 이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묘한 점은 남아있는 토에이 애니메이터들의 정신적 기반은 오히려 애니메이션 스타일에 대한 특징보다는 노조활동에 대한 정신적 지침들이 베이스가 되었다는 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다카하타 이사오, 그리고 오오츠카 야스오는 이런 성향을 짙게 드러내고 있었다. 애니메이터 주도적이라고 볼수는 없었고 시스템화에서 긴밀하게 분업화된 그리고 조직적인 설계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이 시스템하에서 처우개선과 월급인상등을 투쟁의 쟁점으로 삼았다.)
애니메이터로서의 자존심은 어디에..
모리 야스지가 애니메이터의 신으로 불리우는 점은, 애니메이션이 일본에 자리잡을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이루어놓은 제작 시스템에서의 효율성, 그리고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작업형태, 무엇보다도 그가 이뤄놓은 캐릭터 이미지의 일관된 시스템 구축은 성공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이후 거의 모든 애니메이터들의 공감을 얻어냈다고 볼수 있다. ( 모리 야스지는 '애니메이션은 설계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면서 보다 체계적으로 사전작업을 진행해야 함을 역설하곤 했다. ) 이를 고스란히 옮겨 실행했던 부류가 바로 '지브리'다 .(오히려 미야자키 하야오라고 해야 할 판이지만.) 이런 특징은 작품의 질적인 면을 보장한다는 순영향이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은 당시 급조된 형태의 리미티드를 선보인 무시 프로를 의심의 눈길로 쳐다보게된다. '정말 그렇게 해서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수 있다는 것인가' 라는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스타일의 문제라기 보다는 관점의 차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자존심에 대한 묘한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아니메 업계에서 지탄받았던 당시 테즈카의 죄목은 '열악하고 조악한 애니메이션의 제작행태'다. 제작비로 절대 타협하기 힘든 많이 잡아도 75만엔을 넘지 않는 푼돈을 가지고 <철완아톰>을 리미티드로 만들어냈었다. 스스로도 이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토로하였을 정도였으나 TV아니메로의 진출은 당시로선 버리기힘든 절호의 기회였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던 극장판에 대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의 애니메이션 제작의 가이드라인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의 흔적'을 뒤따르는 방식이다 보니 유사 드라마 제작비를 상회하는 제작비를 요구하기에도 어려웠던 측면이 있다. (당시 드라마 제작비가 55만엔 정도였다고 알려진다) 이렇게 저질러진 아톰의 제작비는 '머천다이징'을 통해서 메꿔보려고 노력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실제로는 머천다이징까지 가기전에 고된 업무로 스스로 좌초될 위기에 놓이게 되곤 했다. ( 아톰의 제작회고를 돌이켜보면 테즈카의 고충과 메인 애니메이터들의 목숨을 건 제작이야기가 나온다. 읽다가 보면 아슬아슬하게 일정을 맞추는 인고의 결과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스기이 기사부로와 테즈카의 곡예에 가까운 제작일기가 회자된다.)
미야자키가 이를 두고 '하나도 옳은게 없다'라고 혹평할 정도로 테즈카 사후에도 일갈했으나 TV 아니메의 전환은 시대의 흐름이자 역행하기 힘든 유행의 길이었으므로 테즈카의 탓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스스로도 이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롱 인터뷰 COMIC BOX 1985SUS 5월호) 다만 미야자키와 테즈카의 충돌은 이후 야스지의 후계자로 부각된 지브리쪽과 무시 프로의 후계자들로 인해서 선명한 족적이 갈리게 되는 본의 아니게 계기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해서 갈리게 된 이 계파의 논쟁들은 사실 이후에도 몇번 펼쳐지지만 실제로는 효용성이 전혀없는 소비적인 논쟁에 가깝다. 이는 시대의 흐름에 대한 당시 인식의 차이였으며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역할론'에 대한 이해관점의 다양성에 불과했다. 사실상 TV 아니메 없이 극장판만을 만들면서 주류의 아니메 산업이 육성된다라고 보는 자세는 허울좋은 이야기일 뿐이며, 테즈카의 영향력을 배제하고는 일본 아니메 산업의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톰의 성공이 토에이의 TV 진출을 가속화 시켰다는 지적은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토에이는 자회사로 방송사 NET( 테레비 아사히) 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아톰이 아니었어도 TV매체의 성장을 충분히 컨트롤 할 수단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일본의 경제적 성장은 수요에 대한 폭발적 증가를 매개로 하여 보다 스피디한 산업 전반의 발전상을 요구하고 있었으므로 TV로의 애니메이션 진출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대세 였던 셈이 된다. 이런 힌트는 비단 '아톰'에서만 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 NET계에서 1963년 아톰이 방영되면서 넋놓고 있었는가에 대한 회고가 필요한데 토에이는 아톰이후 재빠르게 새로운 TV아니메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몇몇작품을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레인보우 전대 로빈>(レインボー戦隊ロビン)(1966)이다.
이 작품을 들여다보면 토에이의 TV애니메이션에 대한 보다 선명한 스텝 편린을 유추해낼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요스텝진으로 거론되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스즈키 신이치(鈴木伸一), 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 츠노다 지로우(つのだじろう), 후지코 F 후지오(藤子不二雄) , 이 정도되면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을 수도 있다. 바로 이 멤버들은 다름아닌 테즈카 오사무의 양산박이라고 불리웠던 도키와장(トキワ荘)의 만화가들이니까 말이다. 사실 <레인보우 전대 로빈>(이하 로빈)은 토에이가 외주사에 발주한 작품이었는데 그 외주사가 다름아닌 <스튜디오 제로>였다
레인보우 전대 로빈의 스텝진들, 그리고 사이보그 009
스튜디오 제로는 당시에는 데즈카의 도키와장의 로망을 잊지못한 채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던 만화가중심의 제작사였다. 여기에 토에이측에서 가담한 멤버들로 카바시마 요시오(椛島義夫)(이 분 역시 나중에는 토에이- A프로덕션 - 신에이로 이어지는 브랜치로 이동하는 주요멤버중 한사람이다. 훗날 신에이 동영상의 작품의 외주를 맡았던 몽현관(夢弦館)-무겐칸을 설립운용했다.) , 모리시타 케이스케(森下圭介)(역시 동일하게 쿠스베 다이키치로우(楠部大吉郎)이 설립한 A프로덕션으로 이적한 토에이 멤버중 하나. 나중에 도라에몽의 핵심적 존재로 부각된다. 알아두면 굉장히 많이 듣게 되는 애니메이터중 하나), 타카하시 신야(高橋信也)(-토에이 멤버로 미야자키 하야오, 츠지다 이사무등과 입사동기. 토에이의 전략적인 TV 아니메 진출의 활로로 작감으로 등장, 사이보그 009로까지 이어진다. 009에서 원화, 작화감독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코마츠바라 카즈오 (小松原一男) (-이후 70년대의 토에이 동화작품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인재가 된다. 오모리 분실에서 토에이외주 제작을 진행하게 되고 동시에 무시 프로덕션이나 TCJ의 작품도 병행했던 이력이 있으나 OH 프로덕션시절부터는 철저히 토에이쪽 작품에만 관여했다. 70년대 로봇물에서 다시 언급할 예정.) 가 등장한다.
자 이렇게 되면 토에이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위시한 다카하타 이사오, 오오츠카 야스오로 대변되는 정통 명작계열의 멤버로만 운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로빈의 멤버들이 고스란히 이어진 작품은 바로 토에이 전략의 2nd 활로 <사이보그 009>(サイボーグ009)(1966) 였던 것이다. 토에이는 문예성이 높은 장편의 A작들을 그대로 진행하면서 A작과는 다른 저비용의 내수활로개척용으로 B작을 기획하는 전략에 착수하고 있었다. 이는 프로듀서 기야요시 후미(旗野義文)가 텔레비전 전성기가 도래할 것을 예견한 기획물의 결과였다. <사이보그 009>는 당시 토에이를 통해 연출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던 세리가와 유고(芹川 有吾) 그리고 디자인쪽의 곤노 나오유키(紺野 直幸)를 메인으로 하고 레인보우 전대 로빈의 스텝진을 이식하면서 이 009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각본쪽으로 츠지 마사키(辻真先)도 등장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의 등장은 토에이가 전략적으로 기획한 세컨드안이 신뢰성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므로 A작을 주로 전담했던 미야자키들의 좌절은 토에이의 정책변화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물이었지 <철완아톰>으로 상징되는 테즈카의 파급효과라고 보는건 지나친 해석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B작의 성공을 이어 TV 애니메이션으로 방향을 틀어버리자 토에이 명작계열의 동화진들은 이탈을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다름 아닌 도쿄무비의 전성기이자 인재들의 또 다른 브랜치로 훗날 언급되는 A프로덕션이었다.
이적생들의 집합소, 도쿄무비의 A프로덕션
이때 이적한 멤버들이 바로 앞서 언급한 오오츠카 야스오,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요타베 요우이치등이었는데 토에이에서 A프로, 그리고 신에이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가담한 애니메이터들이 적지 않았다. 유독 A작을 전담했던 멤버들이 이탈이 눈에 띄웠지만 B작을 주로 했던 카바시마 요시오, 모리시타 케이스케도 같은 흐름에 동참하고 있던 것을 보면 이탈은 대세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토에이 동화진들은 노조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예산, 그리고 개선되지 않는 처우를 뒤로 하고 자리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상당수는 여전히 남아서 아니메로서의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었고 특히 명작계열의 동화진들은 훗날 전성기를 열어젖히는 도쿄무비의 A프로덕션에 자리잡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도쿄 무비는 A 프로덕션을 어떻게 해서 만들게 되었던 것일까?
<2> 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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